music diary의 시작.



이런 야심한 시각에 깨어있다는건 어쩌면 불행인가?


가끔은 그렇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무엇을 찾으려고. 아직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시간들 속의 나는 항상 느슨하다.
이럴때에 사람을 만나면 내가 정말 착하게 굴텐데.
왜 사람들은 이런시간엔 약속을 잡지 않을까?
안타깝다. 아니 아쉬운건 그쪽들 일지도.


윈앰프에서 매튜 벨라미가 노래하고 있다.
내 앞에는 2003년 9월의 음악잡지가 있다.
그 속에는 어제 집에서 발견되었던 정체 불명의 nuno 테입을 만나고서 궁금해진 nuno의 역사가 있다.


선풍기는 에너자이저 보다 엄청난 전류를 달고 끊임없이 돌아간다.
춥지만 선풍기를 끌 수 없는 이상한 날씨를 탓해본다.
끄면 덥고 켜면 추운 날씨,
선풍기 탓을 해보자면
미풍과 정지 사이에 버튼이 하나더 있어야 했다.


음악이라는 것은 굉장히 대중적이면서도 또한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기준을 갖는다.
그래서 음악이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모두가 제각각의 음악을 마음에 품고 흔들흔들 흔들린다.

그 음악은 누군가에겐 촌스러울지도
누군가는 알지도 못할지도
누군가에겐 지겨울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다르다.
내가 들을때,
그 음악은 온전히 콩깍지를 동반한 나만을 위한 음악인 것이다.

음악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며 바람을 피워도
나에게 돌아왔을땐 늘 충실하다.

그래서 음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오늘 비가 내리는 거리를 뛰게 되었을때,
목에 걸린 mp3에서 joydrop의 beautiful이 울렸다.
워킨더 레인 비투인더 레인 드롭. 정말 그럴싸 했다.
내가 100번도 더 넘게 부른 이곡은
가사를 뚜렷이 해석하려 들지 않은채
그냥 느낌을 담고 부른다.
마치 그언어가 그냥 나의 기분인 것 처럼.
사실 정확한 해석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영어를 잘 못해서 가끔은 좋기도 하다.

때로는 잘못들은 가사가 내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알고보니 내가 들었던 가사가 아니였을때
내가 알고 있던 가사에 반해 작사가에게 몰래 면박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것도 재미있다.
내가 생각하고 마음대로 만들어가는 이미지.
그 속에서 새로 탄생하는 음악.
그거면 된다. 정확한 것 따위는 필요없다.
남의 해석이나 판단은 절대로 필요없다.
무조건 내 마음대로 느끼면 된다.

그러면 된다.


이렇게 긴 글을 두서없이 쓰게된건
내가 music diary 를 만든이유를 말하고 싶어서 인데.
이런.
날이 밝아 온다.

2004.07.15 04:47

변하고 변하지 않는 것.


사람에게 가지는 감정이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바뀌는건.
내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착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착하지 않았고
다정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다정하지 않았으며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을때
어쩌면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짜증스럽다고 생각한 사람이 좋은사람이되고
못생겼다고 생각한 사람이 잘생긴 사람이되고
시끄럽다고 생각한 사람이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을때
어쩌면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하루하루 바뀌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그에따라 변해가는 내 감정의 기복을 따라다니며
그사람들의 탓이다. 아니면 나의 탓이다. 하는 끝나지 않을
떠넘김과 자책으로, 수없이 뇌를 찔러 보곤 했다.

그사람들의 탓이라 생각한 날엔
사람 정말 믿지 못하는 거라고,
내가 변한것이라 생각한 날엔
난 대체 어떻게 된 아이냐고,

그런것을 실망이라 변덕이라 이름 붙이며
고민에 고민 걱정에 걱정.
사람을 믿은 것이 잘못인가.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잘못인가.
생각을 이어가기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첫눈에 반해 옷을 샀다.
그런데 집에와서 입어보니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아니 일주일간은 예뻐 보였는데 그게 아니였다.

멸치조림은 맛이 없다.
절대로 먹지 않았는데
어느날 먹어보니 엄청 맛있었다.

재작년엔 계란과자가 그렇게 맛있더니
올해엔 칸쵸가 너무 맛있다.

그래, 어쩌면 이런것과 다를바 없다.

사람에게 가지는 내 감정의 변화도
삶에서 통용되는 모든 행동양식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첫눈에 반해서 산옷이 이제는 예쁘지 않다고 해서,
작년엔 계란과자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칸쵸가 더 좋아졌다고 해서,
이제까지 내가 멸치조림을 왜 먹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반성할 필요는 없다.

그런일들은
아무리 신중하고 신중해도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뚜렷한 이유의 근거를 댈 수 없기에.

그들은 그저 그들이고 멸치는 그냥 멸치이고 나도 그냥 나인데,
모두가 그 것 그대로인데. 변해버렸으니.

물론 사람과의 관계는
일방적 감정으로 해결되는 사물과의 관계와는 달라서
그리 간단하게 넘길 수는 없겠지만.

7년전에 산 낡은 코트를 여전히 좋아하고
아무리 마실거리가 많아도 우유가 제일 좋은 것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감정도 분명히 있다. (고 믿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만약 고민하는데 시간을 쓸거라면
나를 영원히 사로잡을 것" 들을 잘 발견하기에 주의를 기울이자.

이제 더이상은,
잘못의 주인도 없는 일로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그저 좀 더 신중해야할 이유를 깨달아야한다.

2004.06.26 00:10

내가 아직 죽지 못한 이유. 70일간의 일주



존재감도 없는 주제에 죽으려고만 들면 뭐 그리 걸리는 게 많은지,
매달 선불로 받은 과외비도, 과외학생이 알게 될 스승의 죽음도,
접수해 놓은 컴퓨터 시험도, 주말에 도와주기로 한 친구의 일도,
모레 발표해야 할 조 과제같은 것들도 전부 마음에 걸린다.
아무래도 나는 매월 과외비를 받기 전날인 4일에
친구의 일을 도와주지 않고,
컴퓨터 시험은 더 이상 접수하지 않은 채 죽어야 할까보다.
물론 교수님이 조 발표 과제를 내주고 싶지 않아 할 때.


것 참 죽기 힘들다.
며칠 전엔 너무 죽고 싶었는데 수면제를 살돈이 없었다.
지갑은 텅 비어 파업중이고 바지주머니엔 달랑 230원이 들어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돈으론 자살바위로 가는 버스도 못 타잖아?
육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어떡할까,
그렇다고 돈 안 드는 무기를 이용해 집에서 끝을 맞으려 하니
안 그래도 도움이 안 되는 내가 집값이나 떨어뜨릴 것이고,
동네의 어느 으슥한 골목에서 죽어 버리려하니
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는 뜬 소문으로
동네 아이들이 밤마다 이불을 적실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의 동네는 더 미안해서 안 되겠다.


사실 저승사자도 무섭다.
하얀 얼굴에 팬더 같은 눈이라니 정말 만나고 싶지 않다.
내가 알아서 찾아 갈 테니 저승길 약도나 그려줬으면 좋겠다.
갓을 쓴 시대착오적인 사자가 아니라
다정한 얼굴의 천사가 데리러 온다면 좋을 텐데.
세상은 죽을 때 까지도 너무 각박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건,
내가 떠나도 남아있을 나의 몸 때문이다.
내가 떠나도 몸은 남아 있을 거란 사실이 두렵고 무섭다.
차갑게 남아있는 내 몸.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
보이기 싫은 약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싹하다.
한 때 자연방화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데다,
언제 어느 시에 일어날지 모르니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그러니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무심한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들을 떨쳐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어느 하루가 온다면
나도 이 세상에서 가루가 되어 날릴지 모르는 일이다.

2004.6.25 AM 03:23

6. 25 또 한번 이런 기분이 되었으므로.

하지만 죽고싶다는 기분이 드는건.
사실은, 정말 잘 살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기하와 얼굴들 - 싸구려커피 아가씨라면 단연 락이지



라이브가 훨씬 더 맛있는 싸구려커피.

썸머 타임머신 블루스 윤도도



이를테면 이런얘기다.

바나나킥을 먹는다.
바나나킥을 먹기 한시간 전으로 돌아가 내가 먹기전인 바나나킥을 먹어버린다.
그렇다면 과거시점으로부터 미래인 '이미 치뤘던 바나나킥먹기 현재'는 그 시간축 안에서는 성립될 수가 없다.

바나나킥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안에서 현재에 바나나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니까,
과거에 바나나킥을 먹어치웠다면 현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바나나킥을 먹으려 즐겁게 집에 도착했는데
누가 먹어버린 바나나킥봉지만 나뒹굴고 있을때,
나는 바나나킥을 먹은 범인을 잡기위해 과거로 달려가고
바나나킥을 먹은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초초한맘에 바나나킥을 먹어 버림으로써 바나나킥을 뺏기는걸 막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가 먹어버린 바나나킥봉지만 나뒹굴고 있었던 이유는 내가 바나나킥을 과거로 돌아가 먹어치워 버렸기 때문이지, 결국 범인은 나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바나나킥봉지만 나뒹구는 불상사가 생겼을때부터 나혼자 생쑈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아니,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내가 바나나킥을 먹었을때부터 쑈가 시작된 것인가?
어쨌거나 과거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불상사를 탄생하게 해주었다. 애초에 과거로 갈 수 없었다면 바나나킥이 사라지는 일따위는 없었을 것이란 말이지.

생각해보면 인과관계가 희안하지만
모두 하나의 시간축 안에서 흘러간다는 것이 전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과거로 돌아간 시간동안 현재에 없는 나와
과거로 돌아간 시간안에서의 현재의 나 가 한 축 안에 있다는 것이고
설령 내가 두명인 때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한명으로 존재한다.

그러면 성립은 이렇다. 성립은 곧 사실이어야하며 사실이다.

만약 현재에서도 먹고 과거로 다시 돌아가 내가 먹기 전에도 먹고싶다면, 시간의 흐름이 하나라는 사실 안에서 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기 전에 분명히 슈퍼에 미친듯이 달려가 바나나킥을 다시 사놓아야한다, 그래야 나중에 또 먹지.

그러니까 그냥 무작정 주어지는 바나나킥 두봉지란 없는것.

600원으로 바나나킥 두봉지를 먹을 수는 없는 법.
두봉지를 먹으려면1200원이 필요하다.

1+1은 없다.
있다하더라도 그걸 사려면 마트까지 가야하고 그러면 차비로 200엔이 들것이다. 아니면 다리가 아프겠지.

아하, 인생은 이런식이고 시간을 떼놓고 봐도 늘 올바르다.
아니, 사실 올바른지 어쩐지는 몰라도 비용은 늘 정확하게 청구한다.

삶에서, 설령 시간을 돌린다해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란 절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은근히 깨달은 것이다.

또 하나 방금 깨달은 것은 내가 아까부터 바나나킥을 무척 먹고싶어하고있다는 사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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